본문 바로가기

까막눈에서 그림일기 작가로!
순천할머니들의 아름다운 도전

까막눈에서 그림일기 작가로!
순천할머니들의 아름다운 도전

할머니들의 꿈은 ‘글을 읽고 쓰는 것’ 그게 다였다. 60대를 앞둔 막내부터 아흔을 바라보는 맏언니까지 스무 명의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겠다고 순천시에서 운영하는 한글작문교실에 모였을 때는 그냥 자신의 이름 석 자 쓰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들은 글과 그림을 통해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늦깎이 작가가 되었다. ‘순천소녀시대’라고 불리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글을 배우고 얻은 소중한 자신감

가난 때문에, 여성에 대한 차별 때문에 한글을 배울 수 없었던 할머니들. 못 배우고 사는 게 억울하고 슬펐지만 그냥 팔자려니 생각하고 칠팔십 인생을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를 ‘까막눈’이라고 불렀다. 간판만 보고서는 그 어떤 가게도 찾아갈 수 없었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것조차 어려워 세상이 높디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자식들에게조차 부끄러워 숨기고 싶었던 그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그림책작가인 김중석 작가의 SNS에 할머니들의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글과 그림이 실렸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순천할머니들의 작품은 순천과 서울에서 전시되었고, 올 2월에는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남해의 봄날)>라는 에세이집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글을 몰라 서러운 인생을 보냈던 할머니들이 늦깎이 작가로 데뷔를 한 것이다.


뭘 하든 자신감이 없었지. 은행이든 병원이든 어디 가서 내 이름 하나 써달라고 하면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워했으니까. 그 세월을 누가 알겠어. 못 배웠으니 그냥 못 배운 채로 평생 살아야 하나 보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김영분 할머니

김영분 할머니를 포함한 스무 명의 순천할머니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건 4년 전 순천시에서 운영하는 평생교육학습센터의 한글작문교실을 찾으면서부터였다. ‘한글을 가르쳐준다는 데가 있다’는 희소식을 들었을 땐 심장마저 쿵쾅거렸다. 그렇게 용기를 내어 교실 문을 연 할머니들. 연필 잡는 법부터 시작해 한글 자음을 배우고 모음을 익혀나갔다. 한점자 할머니는 자신의 이름 석 자 쓰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가 인생을 바꾸어놓았다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처음에는 연필 잡는 법도 몰랐어요. 손도 떨렸지요. 그런데 공부를 하니까 우울하고 활발하지 못했던 마음이 확 달라졌어요. 사는 보람이 생겼고요. 글을 배우면서 ‘용기를 갖고 도전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게 가장 기쁜 거예요.
한점자 할머니



해보고 도전해봐야 한다니까! 그래야 행복하다니까!

할머니들에게는 그림이라는 새로운 기회도 찾아왔다. 순천시립그림책도서관 나옥현 관장이 할머니들의 사연을 듣고 그림책 작가를 초빙해 그림책 만드는 수업인 ‘내 인생 그림일기 만들기’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림 그리기도 처음에는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림을 그려본 적이 한번도 없다며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분들도 있었고, 용기 내어 그림을 그렸지만 보여주기 창피하다며 숨기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김명남 할머니는 그림 배우던 초창기 생각만 하면 아직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생전 해보지도 않은 걸 해보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못한다고 했지. 선생님이 동그라미, 네모부터 그려보라고 했는디, 동그라미도 아귀가 하나도 안 맞고 터져버려. 근데 자꾸 해보니까 그림이 참 재밌대. 꽃도 그리고 병아리도 그리고…자꾸자꾸 그렸지
김명남 할머니

김명남 할머니처럼 순천할머니들은 숙제를 내주지 않아도 집에 가서 몇 백 장씩 그림을 그려왔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미술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평소 사진으로만 바라보던 가족의 얼굴은 그리움 담아 그렸고 기억 속에 가물가물 떠오르던 고향 집도 화폭 위에 살아났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친구, 집 앞에서 주렁주렁 열매가 달리던 커다란 나무도 할머니들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크레파스, 색연필, 물감을 이용해 그린 그림은 천진난만한 유치원생의 그림처럼 알록달록하고 앙증맞지만 소녀 시절의 감성과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었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따스한 기분이 들고 위로를 받는 기분이다.



사는 게 즐거워졌어요. 못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정말 못 하는 줄 알았는데 해보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도전해야 해요. 뭐든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 두렵더라도 해보는 게 중요하다니까. 그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알게 되면 또 하고 또 하고 할 수 있어요.
정오덕 할머니

순천할머니들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 퍼지며 전시를 해달라는 요청이 끊이질 않고 있다. 국내를 넘어 바다 건너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참가해 호평을 얻었으며, 현재 올 6월까지 미국에서 전시도 진행 중이다.
할머니들은 “지금 현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며 입을 모았다. 글과 그림을 전시하는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할머니들을 가장 기쁘게 하는 건 지금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변화’이다. 글과 그림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행복을 전해주고 싶다는 순천소녀시대 할머니들. 삶의 경험과 지혜, 사랑과 철학이 담긴 작품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여운이 되어 남길 바라본다.

소셜로그인으로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로그아웃
0 / 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