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의 책 <트렌드코리아 2019>에서 2019년 10대 트렌드로 조망한 신조어 중 하나인 카멜레존! 주변 상황에 따라 피부색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한 가지 성격에 머물지 않고 복합문화공간으로 기능하는 공간을 뜻한다. 특히 최근에는 오래된 공간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도 다채로운 문화 경험을 가능케 하는 도시재생 건축물이 카멜레존의 대표적인 예로 떠오르고 있다. 버려진 공장이 카페와 갤러리로, 허름한 동네 목욕탕이 서점으로, 낙후된 여관 골목이 젊은 예술가의 등용문으로 탈바꿈하는 현장을 찾아가본다. 글_고경원 칼럼니스트
최근 건축에 불어온 도시재생 바람은 몇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공공 차원에서 추진된 일련의 도시재생 사업, 쇠락한 상권을 살리려는 지역 상인과 문화계 인사들의 협업, 기존 건물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쓸모를 찾아내는 친환경 건축 붐 등이 시너지를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산물로 탄생한 도시재생 건축은 기존 공간에서의 추억을 간직한 중장년층뿐 아니라, 복합문화공간에서의 문화 향유와 소비 경험에 익숙한 젊은 세대를 불러 모았다.
버려진 대형 산업공간의 재발견
공공 영역의 도시재생 건축 중 주목할 만한 사례는 서울시에서 추진해온 일련의 도시재생 사업이다. 이 공간들은 오래된 공공시설을 철거하는 대신,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 지역의 문화 수요와 공간의 역사성 보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도시 재생 건축 사례
이중에서도 마포 문화비축기지는 서울 도시재생 건축의 다양한 공간 활용을 보여주는 사례로 활용되고 있다. 멀리서도 보이는 갈색 건물은 유류탱크에서 해체한 철판으로 건물 외장을 장식한 커뮤니티센터다. 용도를 특정하지 않은 공간은 상황에 따라 가변적 문화체험 공간으로 변신한다. 지난 5월 25일에는 공원 진입로와 이어진 문화마당에서 플리마켓, 친환경 식당, 수공예 체험 공간 등을 아우른 ‘모두의 시장’, 거리예술가와 서커스 극단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서커스 예술놀이터’가 함께 열리기도 했다.
폐공장 건물에서 경험하는 ‘오래된 미래’
도시재생 건축의 대상물로 자주 선택되는 건물에도 일종의 유형이 엿보인다. 특히 폐공장이나 창고 등은 천정고가 높고 건물이 넓어 다양한 성격의 공간으로 활용할 여지가 많다.
폐공장은 한때 지역 주민을 먹여 살렸던 애환과 역사가 묻어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경제적 가치를 넘어선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도시재생 건축은 바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한번 헐리면 다시 되살릴 수 없는 무형의 가치에 주목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강원 정선군에 2013년 조성된 삼탄아트마인도 눈여겨봐야 한다. 이곳은 독일 에센시에 위치한 졸페라인 탄광을 뮤지엄으로 리모델링한 사례를 참고해 2001년 폐광된 정암광업소를 문화공간으로 조성하고, 탄광촌이었던 과거를 담은 레일바이뮤지엄과 기억의 정원 등을 갖추고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여관과 목욕탕, ‘살 냄새 나는 작은 공간’의 부활
모텔과 게스트하우스의 성업에 밀려 쇠락해버린 여관, 찜질방과 사우나에 밀려 찬밥 신세가 된 목욕탕 등 유서 깊은 건물이 도시재생 공간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이들 공간은 규모는 작지만,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밀접하기에 더 친근한 ‘살 냄새 나는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북 군산시 월명동 ‘창작문화공간 여인숙’은 1960년대부터 40여 년간 운영되다 흉물이 된 여인숙을 2010년 지역 예술인들의 레지던시 겸 전시공간으로 리모델링한 경우다. 제주 원도심에 위치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1, 2관은 말 그대로 모텔이 갤러리가 되었다.
오래된 목욕탕의 색다른 변신도 흥미롭다. 서울 애오개역 근처의 복합문화공간 ‘행화탕’은 전시 공간과 카페를 운영하면서 재미난 이름의 시그니처 메뉴로 화제를 모았다. 반신욕 라때(라떼와 때의 합성어), 바나나탕 우유 등 메뉴는 한때 목욕탕이었던 공간의 내력을 연상케 하며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서울 대학로의 고양이 전문책방으로 유명한 슈뢰딩거는 오는 6월 강원 강릉시 노암동에 분점을 연다. 슈뢰딩거 강릉점은 1986년부터 30여 년 간 운영하다 방치되었던 거북목욕탕을 리모델링한 곳이다. 오랜 세월 지역 주민들이 애용하던 목욕탕 구조물을 일부 보존하면서 1층은 카페, 2층 서점, 3층은 서점 겸 편집숍으로 꾸며 이색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열풍과 맞물려 각광받아
도시재생 건축 붐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인더스트리얼 디자인 열풍과도 맞물려 있다. 20세기 초 산업혁명 시기의 공장 내부를 떠올리게 만드는 잿빛 노출 콘크리트와 녹슨 파이프, 지붕을 올려다보면 고스란히 드러나는 철골 구조물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한 인테리어 요소로 각광받으면서, 버려진 도심 속 건물의 가치에 눈을 돌리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로 무장한 도시재생 건축물은 ‘서울의 브루클린’으로 불리는 성수동 일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1970년대 정미소였다 이후 공장 창고로 쓰였던 건물을 카페와 갤러리로 리모델링한 대림창고는 성수동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 카페의 대표 주자다. 한때 금속 부품 공장이었던 갤러리 ‘베란다 인더스트리얼’, 봉제공장 건물을 개조한 갤러리 카페 ‘사진창고’ 역시 거친 듯하면서도 개성적인 인테리어로 SNS에서 화제의 공간으로 떠올랐다.
영국 런던 템즈강변의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해 현대미술의 메카로 부상한 테이트 모던의 성공 사례가 부럽지 않을 만큼, 도시재생 건축은 이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때론 공공성을 띤 모습으로, 때론 지극히 상업적인 얼굴로. 되살아난 이들 공간에서 어떤 경험을 얻을지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향유하는 이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