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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인을 세상 속으로 이끄는 안내자
김숙현 점역사

당신과 나,
두 개의 손이 만나면
세상이 보인다

동원그룹 Challenge Story

시각장애인도 책을 ‘본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지적 호기심은 더 크다.
물론 일반 책을 볼 수는 없다.
시각장애인을 세상 속으로 이끄는 안내자, 9년차 점역사 김숙현 씨를 만났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줄 귀, 맞잡아줄 손만 있다면 얼마든지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게 김숙현 씨의 믿음!
지금껏 열지 않았던 문을 용기 있게 두드리며, 오늘도 김숙현 씨는 세상을 향해 두 손을 힘차게 내밀었다.

시각장애인을 세상 속으로 이끄는 안내자

김숙현 점역사

일본어 전공
해외영업 회사 근무
2011년 점역사 채용 합격
(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점역팀 근무

EPISODE 1

‘희망’을 점역(點譯)하자!

시작은 우연히 본 채용공고였다.
제2외국어를 전공하면서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고 싶었던 김숙현 씨는 졸업 후 해외영업 분야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잠깐 일을 쉬던 중 제2외국어 점역사 채용공고를 보게 됐고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도전하게 됐다.
이 직업을 선택하면 평생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김숙현 씨.
시각장애인은 정안인(비시각장애인)이 쓰는 문자
대신 특수한 점자로 문자생활을 하는데,
저는 이 점자도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어요.
시각장애인의 시험 준비나 문화생활을 위해서는
점자도서 한 권이 정말 간절해요.
또, 점역사가 조금만 소홀해도 시각장애인은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내 일이 많아지더라도 시각장애인이 좀 더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 쓰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시각장애인은 손끝의 감각만으로 세상을 읽어야 한다.
작은 차이로 의미 전달이 흐려지기도 십상이다.
그래서 어문지식도 중요하지만 사용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EPISODE 2

글을 전하고 소통을 배우다

점역은 그야말로 전문적이고도 지난한 작업의 연속이다.
보통 출판사는 저작권 문제로 도서의 원본파일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선 도서를 구매해 스캔한 후 OCR(광학문자판독) 과정을 거치고,
추출된 글자를 몇 차례에 걸쳐 교열한 뒤 1차로 자동점역소프트웨어로 점역한다.
자동점역소프트웨어로는 기본적인 한글, 영어, 간단한 기호만 점역되기 때문에
점역사가 나머지를 찾아 수정하고,
최종적으로 시각장애인 교정사와의 검수를 거쳐 점자도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입사 초기에 제가 담당하는 일본의 시각장애인기관들을 찾아보던 중,
일본점자도서관 홈페이지 첫 화면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읽고 싶다’란 문구가 보였어요.
시각장애인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순간이었죠.
시중에 발간되는 도서량과 비교하면 점역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다.
수학, 과학, 컴퓨터, 제2외국어는 자동점역 자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점역사가 손으로 하나하나 점자를 입력해
점자책을 만든다.
제2외국어 점역사인 김숙현 씨는 주로 일본어 분야의 학습서,
수험서, 원서 등을 제작하고 있다.
언어 특성상 한자를 다른 점역사보다 많이 아는 편인 만큼,
고전 등 한자가 많은 파트의 도서 제작을 주로 진행해왔다.
나라마다 점자 규정이 다르고
수학, 과학 기호 역시 국가별로 상이해요.
외국어 점역의 기본은 해당 국가의 점자 규정을 적용하는 건데요.
원어민의 ‘감’이 필요한 부분도 많아서
언어를 전공했어도 규정 해석이 쉽지 않아요.
현재 그는 점역뿐만 아니라 해외기관의 선진사례를 조사하고, 네트워크를 만들어 양국이 서로 협력하는 일도 한다.
나라와 나라를 잇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잇는 다리가 되었으니, 꿈은 정말로 이루어지는 듯하다.
EPISODE 3

사랑이, 희망이 보여요!

먼발치에서 관망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 없는 세상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동참한 청춘의 내공은 날로 강해지고 있다.
3년 전에는 점자도서 제작 중 일반도서의 이미지 구현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새로운 일을 벌였다.
점자도서에 끼워 넣을 촉각이미지 표현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촉각도서파트로 부서이동을 신청해 2년간 이미지를 *요철화하는 일을 했죠.
바쁜 일정을 쪼개어 시각장애인 대상 외국어 강의도 한다.
입문반의 경우 전맹 학생에게는 외국어 점자의 기본 점형을 가르치고,
저시력 학생에게는 1:1로 함께 연필을 쥐고 기본자 형태를 써보는 식으로 글자를 가르친다.
* 요철화: 표면에 요철이 있는 듯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그림
수강생들이 머릿속에서 내용을 그릴 수 있도록
천천히 반복적으로 수업합니다.
안마업에 종사하는 시각장애인이 외국인 관광객을
맞기 위해 수강하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럴 땐 안마 관련용어도 커리큘럼에 추가해요.
수업을 진행하고 점자도서를 제작할 때마다 분에
넘치는 감사인사를 받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
생각보다도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어깨도 무겁죠.
우리가 제작하지 않으면 시각장애인은
책을 읽을 수 없으니까요.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70대 할머니를 위해
영어학습서 점자책을 찾아드린 적도 있다.
남다른 학구열로 첫 장부터 끝까지 열심히 공부하셨다는
할머니가 ‘덕분에 주위에서 영어 잘한다는 소리 듣고 산다’고
말했을 땐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대학 전공서적을 점자로 의뢰받아
이용자에게 선물한 순간도 기억에 남는다.
점역사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여서 저도 점자를 익혀가며 도서를 만든 터라,
다 만들어놓고도 불안한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이었거든요.
한 학기 동안 교재로 잘 사용했다는 감사인사에 보람을 느꼈죠.
시각장애인의 선거권 보장을 위한 점자선거공보물 제작도 뿌듯했어요.
선거기간이 찾아오면 점자로 선거공보물을 만드는데,
일반프린터와 달리 점자프린터는 한 줄씩 천천히 출력돼요.
저녁도 주말도 없이 제작한 선거공보물이
시각장애인들의 알 권리를 찾아줬다니 고생이 싹 잊히더라고요.
EPISODE 4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마침내 찾아낸 그녀의 꿈은 ‘내가 내민 손을 맞잡고 누군가가 더 넓은 세상을 만나는 것’이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지만, 그 누군가 덕분에 자신 또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에 힘이 실렸다.
사실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더불어 살기 위한 수많은 일들 중 하나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에 비하면 점자도서가 증가했지만,
시각장애인은 여전히 더 많은 점자도서가 필요합니다.
점역 대상도 공무원 수험서, 전공서적, 외국어 서적
등으로 다양해졌고요.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아요.
그만큼 내 안의 세상이 넓어진 거겠죠.(웃음)
김숙현 점역사는 계속 진화할 것이고,
점자책 안에 앞으로 더욱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것이다.

꿈 많은 점역사가 한 땀 한 땀 채워갈 소통의 밀도만큼,
우리 사회의 이야기도 더욱 흥미진진하고 풍성해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