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게도 인류문명의 발전은 전쟁과 함께 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술이 발명되고, 그것이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면서 인류는 보다 편리하고 효율적인 생활을 누려왔다.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나폴레옹이 쏘아올린 작은 공
우리가 간편하게 따서 먹는 통조림도 사실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769~1821)’이 이끌던 프랑스가 전쟁 중에 개발한 기술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8세기말, 나폴레옹은 ‘영양이 풍부하고, 맛이 좋고, 휴대에 편리한 식품을 개발’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내걸었다. 소금이나 설탕과 같은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는 저장법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나폴레옹이 내건 상금은 무려 1만2천 프랑. ‘왕의 몸값’이라고 불릴 정도의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만큼 나폴레옹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 병사들에게 먹이는 식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통조림의 아버지, 제과 기술자 ‘니콜라 아페르’
파리 동쪽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과자 제조기술자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는 1795년 경부터 식품 저장법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페르는 유리병에 고기를 넣은 후, 코르크 마개를 덮고 가열했다. (이 방법은 이태리의 ‘라자로 스팔란자니’의 실험(1775년)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스팔란자니는 고기와 야채를 다져서 만든 액체를 플라스크에 넣고, 끓는 물에 4,5분간 가열했다)
그리고 플라스크의 주둥이에 녹인 버터로 밀봉하였는데, 이 때 플라스크 내의 액체는 오랜 기간동한 부패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최초의 통조림이라 할 수 있는 병조림의 탄생이다. 아페르가 개발한 병조림은 고안된 지 10년 만인 1814년 심사에 합격해 그에게 1만2천프랑의 상금을 안긴다.
하지만 이 병조림은 모스크바 원정이 실패하면서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결국 통조림의 꿈은 나폴레옹의 퇴위와 동시에 사라지는 듯 했다.
캔(CAN)의 등장과 발전
이런 통조림이 다시 부활하며 오늘날의 통조림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810년에는 영국의 피터 듀란드가 주석깡통에 의한 밀봉용기로 특허를 얻으면서부터다. 이후 1921년 미국 보스턴에 통조림 가공공장이 설립되면서부터는 미국 각지에서 활발하게 기업화되었다. 그 후 통조림 제조방법이나 기계설비의 고안 또는 개량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근대산업으로서의 통조림공업이 기초를 닦게 되었고, 제1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최근 군대 전투식량도 발전해 동결건조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통조림’은 없어서는 안 되는 전투식량 가공 기술이다. 장기간 식료품을 보관할 수 있고, 휴대 및 조리의 간편함까지 더한 통조림은 지금까지도 인류의 음식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캔(CAN)의 등장과 발전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통조림 식문화가 확산된 것은 1988년 올림픽 이후 경제호황을 맞이하면서부터다.
특히 고급식품이었던 참치통조림이 대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출시된 동원참치는 출시 초기 수년간은 값비싼 고급식품이었다. 이후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건강성과 편의성이 주목 받아 대표적인 장바구니 식품으로 자리잡았다.
동원참치는 현재 국내에서 한 해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통조림 식품이다. 2019년 기준으로 2억 6~7천만 캔이 팔려나가고 있다.
예전에 깡통이라 불렸던 통조림은 최근 들어 다양한 디자인을 통해 소장용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특히 유명 캐릭터인 펭수, 미니언즈가 새겨진 통조림을 비롯해 유명 아티스트가 디자인한 아트캔 등이 그것이다.